믿음직한 나무그늘

그리고 삶은 나의것이 되었다

리솔 2013. 1. 29. 12:33

 

 

 

 

 

 

어느사이 모퉁이를 돌아버렸을까...

그리고 다가오는 풍경들은 이전에 본 온갖 영화의 잘린 필름 조각들을 두서없이

이어 붙인 것처럼 어디선가, 언젠가 본 것 같은 놀랄것 없는 풍경들...

청춘이, 그것이 지나간 것이다. 참 길고 길었던 허열과 같은 청춘이 정말로 지나간 것이다.

눈을 뜬 채, 그러나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두어 시간이 흘러갔다. 작별 인사를 하듯...

그리고 방안이 밝아질 무렵 나는 여러시간 기침을 해댄 천식 환자처럼 지쳐서 짧은 아침잠에 들곤 했다.

청춘을 보낸 감상은 쓸쓸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청춘의 복무가 끝났으니,

적어도 이제 혁명과 발견을 위한 해일과 같은 난폭하고 무모한 요구들은 가라앉은 것이다.

바다가 빠져나간 갯벌처럼 생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 다정하고 쓸쓸한 기시감.

 

 

 

 

 

 

 

 

어디든, 어디든 가서 한달만, 아무도 모르게 아무 일거리도 없이

이방인으로 거의 버림 받다시피 쉬어 봤으면....

 

 

 

 

 

 

 

 

그리고 보면 운명은 이렇게 가볍게, 내부로부터 말리는 기분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사진 속에 얼굴 피부 아래의 불안과 의심, 열정과 무질서, 그리고 몇해째 장마비를 쏟아내지 못한 먹장구름 같은 완강한 슬픔과 피로와 생의 먼지가 인화되어 있었다. 아마도 힘겨운 생존의 의지가 만들어 냈을 작위적인 미소의 구도속에...오랫동안 연줄을 안으로 감듯 나를 친친 감았을 것이다. 스스로 목매단 개처럼, 혹은 나비를 꿈꾸는 고치처럼, 고집불통의 집거미처럼.

 

 

 

 

 

 

 

 

나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삶은 애욕과 노동이거나 애욕의 노동.

 

 

 

 

 

 

 

 

 

 

한순간 삶이 붕괴되는 때가 있다. 간절하게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괴저의 느낌.

 

 

 

 

 

 

 

 

 

"나는 성냥갑에 갇힌 내가 누군지 몰라서 늘 고놈을 바라본다네."

세상에...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셨다. 갇힌 것이 포박의 고통이 아니라,

응시가 없음이 고통이었구나...

 

"늘 자세를 바르게 잡고 고 갇힌 놈을 가만히 보게나. 흔히 명상을 무념무상하는 것이라고 오해해서 생각을 쫓아내느라 애를 쓰는데, 오감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상념 없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무념의 의도없이 무념에 이르고, 응념의 의도없이 응념에 이르는 것이지. 모든 허구는 바라봄속에서 스스로 재가 되는 것일세. 갇힌 자신이 타자가 될때까지 바라보게나. 그러면 보살은 바깥에 있지 않겠나. 바깥에서 늘 안의 그를 보살펴야 하네. 그를 구하고, 자유롭게 하고, 도를 주고, 신의를 주고, 끝까지 버리지 않고 돌보아야 하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나를 모르는 나를 안다라고 말했네. 내가 모르는 내가 한 일로 마음을 괴롭히지 말게나. 삶에서 일어나는 열렬한 감정들은 샅샅이 느끼고 바라보고 그대로 즐기시게. 다 사는 일이니, 괜찮지 않은가. 자신이 지은 업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 생각들, 느낌과 인식들, 괴로워하고 갈등하고 두려워 하는 나를 죄책감도 나무람도 없이 바라보시게...응시하는 사이에 더러는 저절로 소멸되고 더러는 스스로 발전될게야...그리고 가능한 충일하게 살고 매사를 즐거운 것이 되게 돌리시게."

 

 

 

 

 

 

 

 

 

여행을 떠난다고 했더니 누군가 내게 물었다. 돌아오기는 해요? 한 여자가 15일 일정으로 네팔에 갔는데 7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최고의 여행은 실종이라고 했던가...언젠가 삶의 어두운 끝자락을 행방불명으로 선택한다면

나는 어디를 선택할까...

 

 

 

 

 

 

 

 

 

살아지지가 않아요. 정말 살아지지가 않아서 그래요...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으니 내가 전원을 꽂고 살아주는 가전제품 같기만 해요. 세탁기처럼, 냉장고처럼...그래.이러면 되니? 이렇게 살아 주면 돼? 얼마나 나빠지면 좀 놀래기라도 할래? 여자들의 탄식 소리가 떠 오른다. 우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개미처럼 끊임 없이 삶의 틀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삶은 어디로 빠져 나가 버리고 껍질만 이렇게 수북할까...한방 가득 눈물겨운 양파를 까 놓고 집에는 없는 삶을 찾아서 집 밖으로 나가 보지만....

삶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봄피안 동안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경우라 해도 내가 이 세계속에 온전하게 존재한다는 순수한 충족감이었다. 식물처럼, 동물처럼, 광물처럼 나는 세계에 속한 것이고 이 세계가 책임지고 있는 듯한 신뢰의 느낌. 늘 다리 밑에 버려진 고아같이 슬퍼하고 무서워하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나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지금도 끌어 안고 있는 이 세계라는 든든한 백을 온 감각으로 경험하는 참으로 축복된 기간인 것이다.

이 시기의 끝 무렵인 3월 초에는 나의 생일이 자리하고 있는데 태어나기를 그랬던 것처럼 죽는 날도 봄 피안의 언저리에 들면 죽음조차 나의 상실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 더 깊이 소속되는 능동적인 회귀가 될것 같다.

 

 

 

 

 

 

 

 

 

 

내가 너희에게 희망하는 것은 최선의 학벌도 아니고

최선의 경제력도 아니며 최선의 성공도 아니다.

최선의 생... 그건 스스로 감동 할 수 있는 생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깊고 풍요로운 정서의 힘과 강한 생명력과 삶 속에서 여행 할 수 있는 자유롭고 발랄한 정신과 삶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사색의 힘과 자립의 소박한 투지와 태연한 인내 같은것...그리고 스스로 잘 알고 보살피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람...

말하자면 나는 너희가 스스로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인생은 어찌해도 좋은 거야. 그 상황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괴로움이든 기쁨이든, 밖에서든 안에서든, 높은곳이든 낮은곳이든,

뜨거운 곳이든 차가운 곳이든...

제대로 산다는 건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놓치지 않는 거야. 설혹 나쁜 시간이라 해도 그건 좋은 것을 선택한 것 못지 않은 의미가 있어. 삶의 모든 시간은 똑같이 삶의 기회니까.

 

단지 맹렬히 살고 싶을 뿐이었다. 나의 모든 시간들을.

 

 

 

 

 

 

 

 

 

 

 

이 길은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지우고 길이 되었을까...이 나무는 얼마나 많은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을까...별들은 얼마나 많은 사라진 이름들을 품고 명멸하나, 강과 호수와 바다와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많은 것을 끌어안고 얼마나 먼 곳을 그리워 하기에

저리 깊은 것일까...

내 삶은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킨 뒤에야, 내것이 될 것인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탄생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죽든, 자기 삶 속의 순직이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우리 자신은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어떤 꿈을 꾸어야 할지 자기 생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다.

생이란 처음부터 우리가 간직했던 것이기에.

 

 

 

 

 

 

 

 

 

 

지금은 배를 묶고 이 강변의 나루에 머물러야 할 때이고, 물결 위에 붉은 꽃을 던지듯 세월을 아름답게 흘려보내야 할 때이다. 젊은 날에는 성급함이 가장 큰 탐욕이라는 것을 몰랐다.

많은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도 인생이 꼬이는지 남의 탓도 많이 했었다.

이제서야 내 허물을 깨우친다. 어떻게 시간을 속일 수 있었겠니, 생은 정교하고 공정해.

 

 

 

 

 

 

 

 

 

 

왜 여태껏 나를, 나라고만 생각했을까?

왜 그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왜 바람이고, 낡고 어두운 계단이고, 제비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나는 다섯마리 새끼에게 늘어진 젖을 물린 고양이이며, 열매를 잔뜩 단 휘어진 사과나무이며, 말똥구리가 굴러가는 풀밭이며 오래 잊혀진 옥상이다. 나는 좁다란 숲길이며, 나비이며, 별꽃풀이며, 날아간 리본이며,작은 개울이며, 먼지이지.

나 이젠. 무엇이 되어도 좋다.

 

 

 

 

 

 

 

 

 

 

지금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삶에서 이런 저런 상황이나 조건이란,

그저 요리의 재료 같은 것이다.

재료 하나가 빠졌다거나 부실하다고 해서 요리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 해도 싱싱하고 탐스러운 한 덩어리의 삶이 있지 않은가...

다만 미소를 섞을 수만 있다면, 시니컬한 미소라 해도. 우리는 누구나 남다르게 생겨 먹어서 어차피 남다른 양념을 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저마다 다른 맛을 창조 할 수 있다.

맑거나, 깊거나, 맵거나, 심심하거나, 칼칼하거나, 구수하거나....그래서 세상은 좋은 것이다.

제발 재료 한 두가지가 없거나 부실하다고 해서 나머지 재료들이 시들어 가도록 한없이

유보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생은 지금이다.

이 땅위에서, 하늘 아래, 우리가 살아가는 한, 항상 있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젊다는 것은, 삶이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있을 때이다.

지금이 가장 힘든 때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헤쳐 나가는 때...

모든것이 별 이유도 없이 밝게 보이는 그런 희망의 시간.

젊지 않다는 건, 삶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때가 아닐까.

그렇다고 어둡지는 않게, 그런 희망의 시간.

사람의 정신 연령은 대부분 열 두살이라고 한다. 많이 봐야 열 여섯살이라고.

그 외엔 노화이고 삶의 기술이라고.

존재하는 것들 모두 애틋하다.

 

 

 

 

 

 

 

 

 

난 죽으면 하나의 커다란 시선이 되고 싶어요. 단 하나로 충분한 아주 커다란 시선으로 공중에 떠 있는 거예요. 관통도 아니고 통찰도 아니고 응시도 아니예요.

내 시선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간여도 하지 않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어요.

그건 관조예요.

 

 

- 전경린 -